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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처리특례법 개정해야
  • 이병문
  • 등록 2006-03-15 09:4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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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교통사고 피해자가 가해자 얼굴 한 번 보기 어려운 세상이다.

교통사고 피해자 A씨의 경우를 보자.

A씨는 지난해 가을, 왕복 2차로 길을 걷다가 차에 치여 머리를 크게 다쳤다. 다행히 의식을 회복했지만 가해자의 얼굴은 고사하고 연락 한 번 받아본 적이 없다.

사고 당일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귀가한 가해자는 단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다. 종합보험에 가입돼 있어 형사처벌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통사고 피해를 신속히 배상하게 하고 국민 생활의 편익을 증진한다는 목적으로 1982년부터 시행된 '교통사고처리특례법(일명 교특법)'이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는 것이다.

▶종합보험만 들면 사고내도 괜찮다?

A씨의 경우 처럼 가해자 얼굴 한 번 보지 못하는 교통사고 피해자들이 적지 않다. 횡단보도 근처에서 차에 치이면 정신을 차리고 손을 뻗어 횡단보도를 짚어야 나중에 가해자 얼굴이라도 볼 수 있다는 말이 나돌 정도다.

대부분 운전자들은 '사고가 나도 보험으로 처리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운전자의 도덕적 해이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도적으로는 교통사고처리특례법 제3조 2항 및 4조 때문이다. 이 규정은 교통사고로 인한 손해배상금 전액을 보상하는 보험 또는 공제에 가입하면 뺑소니, 음주 운전, 과속, 횡단보도 사고 등 11가지 중대 교통법규 위반이거나 피해자가 사망하지 않는 한 기소를 면제한다는 내용이다. 피해자가 식물인간이 될 정도로 심하게 다쳐도 합의한 것으로 간주한다.

교특법은 24년 전인 1981년 12월 31일 제정됐다. 교특법 1조는 '피해의 신속한 회복'과 '국민 생활의 편익 증진'이 제정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교특법이 시행된 1982년 이후 몇 년간 교통사고는 큰 폭으로 증가했다. 자동차 보유 대수가 늘어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고를 내면 안 된다는 운전자의 인식이 이전에 비해 크게 약해졌기 때문이다.

▶보험이 형사상 면책 수단인가

교특볍은 제정 당시 다른 의도가 있었다는 후문도 있다. 이 제도가 당시 추진 중이던 고급 공무원의 자가운전 계획을 뒷받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현재까지도 끊이지 않고 있다. 공무원이 교통사고로 형사처벌을 받으면 신분상 불이익을 받아 이를 피해 갈 수 있는 장치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분명한 것은 원래 보험은 교통사고로 인한 피해자의 손실을 보전하기 위한 수단인데 한국에선 교통사고 범죄에 대한 형사상 면책 수단이 돼 버렸다는 점이다.

이런 점을 악용해 일부러 사고를 내고 보험금을 타내는 보험사기도 해마다 늘고 있다. 병원 사무장, 보험설계사 등과 짜고 교통사고를 낸 뒤 피해를 부풀리는 등의 수법으로 보험금을 타내는 사례는 비일비재하다.

또 자동차보험 가입자들이 형사처벌 면제 특혜를 받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비싼 보험에 가입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사실 사고를 냈을 때 보상 범위는 1억∼3억 원 한도면 충분하지만 교특법 혜택을 받기 위해 대부분의 가입자가 '무한보상 옵션'을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자동차 종합보험 가입률은 전체 등록 차량의 87%에 이른다.

▶한국 외에는 비슷한 입법 사례 없어

종합보험 가입과 형사처벌을 연계시키는 법은 전 세계에서 한국에만 있다. 일반적으로 보험으로 민사 문제는 해결되지만 형사처벌은 따로 받게 돼 있다.

영국에선 교통사고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에게 피해액 전액을 배상하는 보험에 모든 운전자가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한다. 하지만 이 보험은 오직 민사상 손해배상을 위한 장치다. 한국처럼 가해자를 형사처벌하지 않는 혜택은 없다.

미국은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예컨대 음주운전을 하다 사고가 나면 피해자가 본 손해와 상관없이 가해자의 사회적 지위, 재산 상태 등을 고려해 가해자가 타격을 받을 수 있는 수준의 손해배상액을 결정한다.

현재 많은 사람들이 교특법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있는 편이다. 한 교통관련 단체의 조사에 따르면 교특법을 폐지하거나 개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80% 이상이다.

지난 1997년에는 일부 인사들이 교특법 특례조항이 헌법의 평등원칙, 과잉금지원칙 등에 위배된다는 취지의 헌법소원을 낸 적도 있으나 헌법재판소는 기각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재판관 9명 가운데 절반이 넘는 5명이 위헌 의견을 냈다. 위헌 결정은 6명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교특법 페지에 일각에선 범법자 양산을 이유로 반대하고 있다. 하지만 교특법은 한국 외에는 어느 나라에서도 없는 법이다. 형사처벌을 하지 않는 통에 운전자의 도덕적 해이가 갈수록 심각해지고 있고 이 점이 교통사고 감소의 큰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인간의 양심 훼손을 유도하고 있는 점은 가장 큰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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